일요일, 9월 20, 2020

첫 눈

11월2일, 가을이 가기 전 로키의 단풍을 담아내기 위하여 모처럼 휴가 온 아들을 동원하였다. 캐네디언 로키야 수도 없이 오르내려 눈을 감아도 어느 곳이 뷰 포인트인지 알 수 있었지만 이날은 예외였다. 새벽 4시반, 에드몬톤을 출발하여 2번 하이웨이를 1시간 반 달리니 레드디어에서 마운틴 하우스방향으로 11번 국도와 만나는 길이 나온다. 이곳이 오늘의 목적지 레이크루이스 방향의 아름다운 단풍길이다. 커피 한 잔 마시지 못하고 여명으로 번져오는 호숫가에 도착한 시각이 7시반, 2천5백m가 넘는 영봉들이 즐비한 로키에서 일출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람한 고산 고봉을 밀쳐내고 올라오는 태양의 찬란함을 맛보기 전 날씨는 이미 흐림 모드로 가고 있음을 느낀다. 3시간 새벽을 달려와 30분을 기다린 끝에 진통을 시작한 산모의 해산을 본다. 말이 필요 없다. 장관이다. 함께하지 못한 이들이 떠오른다. 빛 갈라짐이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멋진 프레임으로 고개를 밀어 올리더니 이내 구름 속으로 들고나길 반복하며 고봉 속으로 사라진다. 지리산 천황 봉 일출을 보려면 3대를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다는데 이곳 로키에서의 일출은 그보다 훨씬 힘들다. 그런 일출을 이방인 생활 12년째에 아들과 함께 보았으니 분명 행운의 징조가 아니겠는가?

 

기쁜 감정을 억누르며 갈 길을 재촉한다. 나의 기억 속 창고에 메모되었던 단풍군락지가 보이지 않는다. 쵸코렛 산과 화이트 마블산도 보이지 않는다. 구불구불 호수를 돌아 이어진 단풍 길, 열흘만 일직 왔더라면 최적의 단풍을 볼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으로 차를 몬다. 그만큼 로키의 단풍이 절정인 때 맞춰 찾아오기가 힘들다. 그나마 마운틴 하우스에서 주유소를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하여 단풍 어때 하고 물었더니 지금이 최고란다. 그런 단풍이 카메라를 맨 나의 눈에는 보이질 않는다. 로키의 호수와 준령을 원경으로 바라보면 노오랗다. 그러나 그 깊이 있는 가을을 담기 위해서는 디테일 하게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 시점이 꼭 열 흘쯤 지나 찾아온 것이다. 이 심오한 사진세계를 모르는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 바라보면 온통 노란 가을이니 지금이 적기라 한 것이다. 잠시나마 원망을 한 친구에게 미안하다.

 

우리는 다시 차를 몰았다. 자작나무와 단풍평전을 지나고 있다. 앞으로 1시간20분을 더 달려야 캐네디언 로키의 진주 레이크루이스에 도착한다고 GPS가 안내한다 좋은 세상이다. 구물거리던 날씨가 레이크루이스에 도착할 무렵부터 심상치 않다. 꼭 심술 난 시어머니 같은 날씨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눈이 내린다. 첫눈이다. 반갑다. 시간은 열 시를 가리킨다. 새벽에 급히 만들어 온 샌드위치와 커피를 꺼내 창밖에 휘날리는 첫 눈을 바라보며 허기를 메운다. 맛있다. 장비를 챙겨 로키의 진주 레이크루이스에 오른다. 첫 눈 치고는 폭설에 가깝다. 바람을 타고 거칠게 로키 준령을 넘어 호수로 몰려드는 천군만마, 이내 아름다운 로키의 진주를 평정한다. 시계는 제로, 한 순간이 지나자 저 멀리 휴식중인 보트와 만년설이 오버랩 되었다 사라지고 옥색의 비취 호수는 흔적을 감췄다. 여기저기 눈을 맞으며 사진 찍기에 바쁜 관광객들,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이를 외친다. 즐겁고 행복한 모습들이다. 카메라 렌즈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면포를 씌우고 조심스레 호숫가를 거닌다. 무심한 바람소리조차 명상에 잠기는 이 산촌의 고요가 좋다. 호수의 정 중앙, 노 오란 들국화 한 무더기 흰 눈을 머리에 이고 반겨준다. 어디선가 작은 산새소리 정겹게 들린다. 로키의 천하 일경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맞는 10월의 첫 눈 모두가 축복이다.

가을 옷 사이로 파고드는 찬바람, 갑작스레 예고도 없이 퍼붓는 첫 눈이 일년 여 만에 로키를 찾아온 나의 여정을 앗아가 버렸지만 싫지 않은 것은 어인 일인가? 샷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아려온다. 기온의 급격한 변화와 온도차이로 아들의 안경 속은 뽀얗다. 첫 눈은 누구에게나 설렘으로 다가온다. 이런 날은 두고 온 고향산천과 벗들과 지인들이 떠오른다. 불혹 지나 지명의 강을 건너는 나에게도 청년시절처럼 달뜨게 하는 마력을 가진 첫 눈, 겨울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가을은 나무의 화려한 외출을 시샘하는 첫 눈에 떼밀려 자신을 물들이지 못하고, 온 산을 물들이지 못하고, 속수무책 추풍낙엽 신세가 되어 스러진다. 나도 나무들처럼 방한복을 준비하지 못하고 손마디 얼어터지는 고통 속 에서 오로지 한 점 건져 올리겠다는 의지만으로 샷터를 누르지만 이런 날씨엔 사진은 치명적이다. 들쳐 맨 장비 가방이 무겁다. 렌즈와 바디가 습기 차지 않도록 신경 쓰다 보니 추운 줄도 모른다. 어린 시절엔 왜 그리 눈이 많이 내렸는지 눈이 오는 날 송림으로 둘러 쌓인 고향마을에 저녁연기 오르면 참새떼들은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온다. 어린 지혜를 짜내어 참새몰이에 나섰던 악동들 착한 눈을 가졌던 그 유년의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고 싶고 그립다. 모닥불 피워 놓고 손안에 감겨오는 커피 잔의 따스함을 느끼며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우고 싶다.

 

어느새 로키의 진주 레이크루이스는 천의 얼굴로 변신 중이다. 산촌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뒤로하고 하산하여 돌아오는 길, 갈 길이 바쁘다. 레이크루이스 초입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12키로의 산길을 다시 오른다. 로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레인 호수를 보기 위해서다. 역시 이곳도 첫 눈이 퍼붓고 있었다. 에머럴드 빛 호수는 보이지 않고 포근한 미소로 맞아주던 일곱 봉우리 바위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실망이다. 그러나 바로 위안을 한다. 찾아올 때마다 환하게 웃는 모습만 보여줬으니 이렇게 눈 내리는 모습의 모레인 호수를 보는 것도 행운이라고.. 높은 산과 기암괴석 호수와 나무들은 이미 동면에 접어드는 모습이다. 이 아름다움도 오늘로 문을 닫는다. 눈이 많이 쌓이면 좁은 산길이 위험하기 때문에 로키의 관광 포인트들은 첫눈이 내리는 9월말에서 10월초면 모두 크로스를 하게 되고 레이크루이스 만 설경을 감상할 수 있게 겨울에도 문을 연다. 몇 년 전 모레인 호수에서 떼밀려 온 통나무를 밟고 호수를 건너다가 발이 미끄러져 그 푸른 호수에 빠졌던 모니카를 건져 올렸다. 에메랄드 옥 빛 호수를 통째로 사버렸으니 누구보다도 부자인 모니카 사람들의 시선을 받던 기억이 새롭다. 

 

하산을 서두른다. 산길은 고요를 깨트리는 첫눈이 비움과 나눔으로 행간을 가득 메운다. 이내 바람이 한몫 거들고 나서며 소우주 먼 창공으로부터 날아와 착한 사람들에게만 천만 송이 행운의 하얀 눈꽃을 선사한다. 미쳐 떨어지기 전에 눈꽃을 품에 안는 자작나무 잎들 기쁜 표정이다. 레이크루이스에서 자스퍼 국립공원 방향으로 76킬로를 달리면 레드디어 이정표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에드몬톤으로 향하는 길, 30분쯤 달리자 50여 마리 산양 떼가 무리를 지어 도로를 막아 선다. 로키에서는 언제 어디서고 산양과 사슴 곰 무스등의 야생동물이 나타난다. 야생동물의 천국인 이곳 로키, 반가움에 연신 샷터를 누른다. 그만큼 동물들의 출현이 많기 때문에 밤길 운전은 극히 위험하다. 시속80킬로 이상 운전시 동물들이 달려들면 운전석 유리를 깨고 밀려들어 자칫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 창조주께서는 공평하시다. 로키의 비경을 보지 못한 보상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야생 동물들을 무더기로 보내신 모양이다. 한여름 연도를 붉게 달구었던 들꽃도 사위어 마른 대궁으로 도열하며 하얀 첫눈을 순결한 미사포처럼 쓰고 있다. 축복 같은 정적이 흐르는 산길을 벗어나니 로키의 준령을 삼키고 호수를 메우던 2009년 10월2일의 첫 눈도 여기서 멈춰 선다. 이제 겨울의 시작이다. 오랜만에 아들과의 로키 여행에서 보기 힘든 산과 호수의 일출을 보았고, 장엄한 첫 눈의 축복을 받았으니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내게 가족이라는 끈의 소중함은 늘 기쁨과 희망을 준다. 비록 어렵지만 이 고통을 모니카와 아들과 함께 이겨내리라 다짐하며 돌아오는 길, 11번 도로를 3시간여 달리니 2번 하이웨이가 나온다. 또 다시 레드디어에서 1시간 반을 달렸다. 저 멀리 에드몬톤 시가의 불빛들이 적요에 쌓인 모습으로 시야에 나타난다. 꿈꾸듯 로키의 산중에서 만난 10월초의 첫 눈, 비록 나의 기억 속에 자리한 아름다운 로키를 감상하지 못하게 하였지만 로키는 언제나 장엄하고 정중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우뚝 솟아있다. 함께하지 못한 지상의 착한 이들에게 제일 먼저 순결한 첫 눈 소식을 전한다. 서설의 축복을 드린다.

이상목(시인/수필가)

캐나다 한국문협 부회장(에드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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